2023년 1월 14일 토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1, AD 57]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11()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일설에는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왕의 성은 석씨(昔氏),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바로 시조 혁거세(赫居世) 재위 39(B.C. 19)의 일이었다. 이때 바닷가의 할멈이 줄로 끌어서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짝을 열어서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며 따라 다녔으므로, 까치 ()’의 글자를 줄여서 ()’으로 씨()를 삼고, 또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탈해(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南解王) 5(8)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10)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寡人)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탈해(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2, AD 58]

 

호공을 등용하다 : 5801()

2(58) 봄 정월에 벼슬을 내려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삼았다.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다 : 5802()

2(58)2월에는 시조묘(始祖廟)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3, AD 59]

 

토함산에서 이적이 나타나다 : 5903()

3(59) 3월에 왕이 토함산(吐含山)에 올랐는데, 검은 구름이 마치 덮개 모양으로 왕의 머리 위에 떠 있다가 한참 뒤에 흩어졌다.

왜와 우호 관계를 맺다 : 5905()

3(59)여름 5월에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살별이 나타나다 : 5906()

3(59)6월에 천선(天船) 자리에 살별[星孛]이 나타났다.

 

[5, AD 61]

 

마한 장수가 항복해 오다 : 6108()

5(61) 가을 8월에 마한(馬韓)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7, AD 63]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오다 : 6310()

7(63)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영토를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8, AD 64]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다 : 6408()

8(64) 가을 8월에 백제가 병사를 보내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백제가 구양성을 공격하다 : 6410()

8(64)겨울 10월에 백제가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왕이 기병 2,000명을 보내어 격퇴하였다.

지진이 일어나고 눈이 내리지 않다 : 6412()

8(64)1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9, AD 65]

 

알지가 태어나고 계림을 국호로 삼다 : 6503()

9(65)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10, AD 66]

 

백제가 침략해 오다 : 66()

10(66)에 백제가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200명을 머물게 하여 성을 지키게 했으나, 얼마 있지 않아서 되찾았다.

 

[11, AD 67]

 

주주와 군주를 설치하다 : 6701()

11(67)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 나라 안의 주(), ()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라고 불렀다.

순정을 이벌찬에 임명하다 : 6702() )

11(67)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14, AD 70]

 

백제가 침략해 오다 : 70()

14(70)에 백제가 침략해 왔다.

 

[17, AD 73]

 

왜가 침략해 오다 : 73()

17(73)에 왜인(倭人)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략하니, 왕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가 죽었다.

 

[18, AD 74]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다 : 7408()

18(74) 가을 8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니, 병사를 보내어 막게 하였다.

 

[19, AD 75]

 

가뭄이 들어 진휼하다 : 75()

19(75)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창고를 열어 구제할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백제가 와산성을 차지하다 : 7510()

19(75)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20, AD 76]

 

백제를 정벌하다 : 7609()

20(76)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蛙山城)을 되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 AD 77]

 

가야와 황산진에서 싸우다 : 7708()

21(77) 가을 8월에 아찬(阿飡) 길문(吉門)이 가야(加耶)의 병사들과 황산진(黃山津) 어귀에서 싸움을 벌여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길문을 파진찬(波珍飡)으로 삼고 군공을 포상하였다.

 

[23, AD 79]

 

혜성이 나타나다 : 7902()

23(79) 2월에 혜성(彗星)이 동방에 나타났다. 또 북방에도 나타났는데, 20일 만에 사라졌다.

 

[24, AD 80]

 

큰 바람이 불고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 8004()

24(80) 여름 4월에 경도(京都)에 큰 바람이 불었다. 금성(金城)의 동쪽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탈해이사금이 죽다 : 8008()

24(80)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성 북쪽의 양정(壤井) 언덕에서 장례를 치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제 4 대 탈해이사금 ( 脫解尼師今 , AD 57~80)   [1 년 , AD 57 년 ]   ▶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 년 11 월 ( 음 ) 탈해이사금 ( 脫解尼師今 ) 이 왕이 되었다 . [ 일설에는 토해 ( 吐解 ) 라고도...